징기스칸의 리더십 파워 :: 2008.10.22 11:01


 

 

1162년에 오논강 수원지대에서 태어난 징기스칸은 65세로 눈을 감을 때까지 40여 개 국을 정벌해 나가는 과정에서 리더로서의 남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1995년 12월 31일 미국의 워싱턴포스트지는 과거 1천년 동안 인류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징기스칸을 선정하였다. 리더로서 징기스칸의 실체는 무엇인가?어렸을 적부터 징기스칸의 아이디어는 분명하였다. 부족들을 통일하여 초원에 평화를 가져오는 것. 그는 죽을 때까지 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고 살았지만 원하는 아이디어가 무엇인지는 머릿속에 확고히 각인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탐구하였다. 그는 규칙을 중시하는 성품과 지략을 겸비하고 있었으며 이민족에 대해서도 개방적 자세를 보였다. 당시 몽골 초원은 부족들끼리 서로를 먹고 먹히는 야생적 생존 경쟁의 현장이었다.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가 다른 부족에게 독살 당했고 그의 할아버지도 금 나라에게 살해당했었다. 아버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다른 부족들의 공격으로부터 가족을 지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스스로 힘을 기르고 전쟁의 논리를 터득했는가 하면, 비록 몰락했지만, 뼈대 있는 부족장의 후예로서 초원 평정이라는 높은 뜻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을 차분히 이어 나아갔다. 징기스칸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호라즘과 헝가리에서 중국의 금에 이르기까지 정복하는 데 불과 20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병사도 몽골 군은 기병 10만이 고작이었고 나머지 필요한 병사들은 잡힌 자나 투항해 오는 자들을 활용하였다. 당시 몽골의 인구가 100만 정도였으며 금 나라의 인구는 약 6,000만에 병사는 100만이 넘었다고 한다.
징기스칸과 그의 손자들이 정복한 세계의 인구가 약 1억 명에 달했다. 몽골의 기병 10만은 1당 100의 전사들이었다. 말 타기에 무척 능하여 전장에서는 그들의 스피드를 당할 자가 없었으며 징기스칸에 대한 충성심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징기스칸의 명령에는 조건을 달 수 없었다. 장수들은 도망간 적장을 끝까지 추적하여 목을 베어 오는 것은 물론이었고 전장에서 지고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한 규칙과 규율을 철저히 지켰으며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를 어겼을 시에는 달게 벌을 받았다. 징기스칸의 장손인 바투가 동유럽을 정벌할 때였다. 하루는 병사가 장막(겔)으로 뛰어들어 오더니 자기를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자기가 보초를 서다가 졸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조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바투는 규칙대로 이 병사의 목을 베어 높이 메달아 근무태만을 경고한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몇 대를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보상을 해 주었다. 또한 징기스칸은 의리를 중시하여 적장의 부하가 자신이 섬기던 적장의 목을 베어와서 항복하면 아무리 그가 출중하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 투항한 자를 처참하게 죽였다. 그러나 잡혀온 자가 끝까지 자신의 군주를 섬기고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면 다양한 회유책을 써 그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곤 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규율은 징기스칸이 구축한 강력한 시스템과 맞물려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즉, 그는 전군을 100호, 1000호 등으로 조직하고 각각에 리더격인 장을 두어 이끌도록 하였다. 각 호는 철저한 규칙에 근거하여 운영되었다. 또한 징기스칸은 호장의 아들을 하나씩 뽑아 케시크테라는 자신의 친위대를 결성하였는데 이것은 각 호의 장들에게 자부심을 부여함과 아울러 일종의 볼모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내부 반란이 끊일 날이 없었던 때라 호장들의 반란을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호장으로의 승진은 철저히 능력 위주로 이루어졌다. 능력이 없는 호장은 장 자리에서 파면하고 전장에서의 성과가 높고 충성심이 있는 사람위주로 임명하였다. 징기스칸은 평생을 함께 한 동지 여덟을 사구(四狗)와 사마(四馬)로 임명하여 군 조직 체계를 완성하였다.징기스칸은 능력 위주로 등용했을 뿐 아니라 전리품들을 모든 병사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이 과정에는 위아래나 민족이나 출신상의 차별이 없었다. 이와 같은 공평무사한 제도는 많은 이민족 병사들에게 커다란 인센티브로 작용하였으며 몽골 군의 정복에 대한 몰입도 날로 확고해져 갔다. 징기스칸 자신도 평생을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겔에서 생활하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동고동락했다. 징기스칸 군은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새로운 전술들을 개발해 냈다. 무기 개발에 전념하는 부대를 따로 두었으며, 성이나 나라를 정복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죽였어도 기술자들만은 반드시 잡아다가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성을 공격할 때면, 창을 쏘는 기계, 화살을 쏘는 노포, 석유에 불을 붙여 던지는 장치, 커다란 돌을 날려 성문을 부시는 기계 등 다양한 무기들이 활용되었고 또 끊임없이 새로운 무기들을 만들어 냈다. 전술에 있어서도 적과 전면전을 벌여 쓰러뜨린 경우보다 내분으로 스스로 무너지게 하던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초원으로 유인하여 기동력을 활용하여 몰살시키던가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항상 적진에 상인이나 성직자를 가장한 첩자를 두고 충분한 정보를 얻어 철저히 분석한 뒤 상대방의 약점을 공략해 들어가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학자들 중에는 징기스칸은 싸워서 정복한 경우보다 싸우지 않고 정복한 경우가 더 많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다.
또한 그는 사방을 잇는 역참 제도를 두어 자신의 명령이 광대한 영토의 구석구석까지 신속하게 스며들 수 있도록 하였다. 사실 징키스칸 시대의 전쟁에서 스피드의 문제는 더없이 중요한 요소였다. 그의 군대는 유목민의 특성상 모두 기병이었으며 장기간의 이동을 위해서 한 병사 당 말을 두세 필씩 가지고 다녔다. 또한 양이나 쇠고기를 말려 분말을 만들어 소의 오줌보에 넣고 다니다가 물에 타 마실 수 있도록 하여 보급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었다.
징기스칸의 전쟁사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1206년 끝난 몽골 초원 통일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계 정복을 위한 전쟁이었다. 둘째 번의 세계 정복 전쟁은 그 목적이 경제적인 데 있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물론, 유목 민족의 타고난 정복 욕, 주변 강대국에 시달려 온 데 대한 복수심, 주지적인 자연 재해로부터의 탈출,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약육강식의 국제 정치 논리 등 다양한 동기가 적용했던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정복의 경제적 동기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학자들간의 중론이다. 여러 학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지지하고 있다. “유목 경제는 가축을 방목해 젖과 고기, 그리고 가죽을 얻는다는 단순한 생산 과정의 반복이므로 다른 물자들은 전쟁을 통해서만 획득 가능하였다.”, “몽골 경제 부흥이 시급했던 징기스칸은 단순한 약탈전이 아닌 계획경제전쟁을 결단할 것이다.”, “몽골 유목민들이 스스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무기류를 제외하면 간단한 일상용품 정도였다. 따라서 수렵 유목민들도 교역 규모는 작았지만 생필품 구입을 위해 결국 국제무역의 가운데로 말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징키스칸은 상인들을 중시하여 관리로 등용하기도 하고 “상인은 누구도 공격할 수 없다.”는 칙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 위에 유럽과 아랍권과 중국권을 엮는 거대한 교역 공동체가 탄생하였으며 그 전 과정을 징키스칸 군대가 지켜 주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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